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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시작 이틀째였다. 몇년 전, 미국 미주리 대학으로 언론 연수를 갔던 나는 오랜만의 캠퍼스 생활에 들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에선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콘서트라도 열리고 있는 건가 싶어 신이 나 뛰어갔는데, 학내 집회 현장이었다.

본관 앞 광장에 모인 대학원생 수백 명이 학교 당국을 향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피켓에는 “학교 당국은 부끄러운 줄 알라” “대학원생을 위한 교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집회 참석자 중 교직원 혹은 교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학생들의 발언을 경청했고, 구호에 맞춰 함께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지역 일간지 홈페이지에 톱으로 걸린 뉴스는 낮에 내가 목격했던 그 집회에 관한 소식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대학 당국이 대학원생들의 의료비 지원을 새 학기부터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삭감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기사에는 월세 등에 비해 학교의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해서 배우자가 투잡, 스리잡을 뛰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석·박사생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그러나 그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날 집회에 동참했던 한 교수의 멘트였다. “내 연구실은 이들 덕에 굴러가고 있고, 내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 덕분에 정부로부터 (충분한) 의료비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지원은 부족하다 못해 너무 모욕적이다.”

대학원생에 대한 착취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역시 한국보다는 미국의 상황이 낫다고 생각했다. 과연 한국에서 학생들의 집회에 동참해 실명으로 신랄한 인터뷰를 해줄 교수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말이다. 대학이 언제부턴가 이윤을 내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학내 구성원 누구도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저널리즘 스쿨에서 청강을 하고 있던 취재 실습 시간이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당국자가 대답을 회피할 때 어떻게 진실에 접근해야 하는가’였다.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의료비 삭감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며칠 전 대학 총장을 직접 인터뷰한 대학 신문 기자가 있었다. 교수는 그와 총장의 인터뷰 녹취 파일을 강의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틀었다. “의료비 지원 삭감 방침을 누가 주도적으로 결정한 것이냐”는 학생 기자의 질문에, 총장은 계속해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어물쩍 대화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러니까 그 교수는 ‘책임을 회피하는 능구렁이 같은 당국자’의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 총장을 살아있는 교재로 삼은 것이다. 그는 수업을 마치기 전, “총장의 이메일을 정보공개 청구해 그가 의료비 지원 삭감 정책을 누구와 사전에 상의했는지 알아내는 것도 좋은 접근 방법”이라며 “혹시 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언제라도 나에게 메일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미국에서는 공립대 총장 이메일도 정보공개 대상이 된다.)

집단행동이 계속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미주리대 총장은 의료비 삭감 정책을 전면 백지화하고, 자신의 소통 노력이 부족했던 데 대해 공식 사과했다. 교수가 학생들의 편에서 함께 행동하고, 자신의 전문성과 지식을 보태 학생들의 권리 보장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 어찌 보면 그 당연한 일이 놀라움을 넘어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까지 다가왔던 것은 내가 ‘갑질 논란’으로 얼룩진 한국의 대학사회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 듯했다.

최근 한국에 대학원생 노동조합이 처음으로 결성됐다.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수시로 호출당하고, 각종 폭언과 성희롱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러면서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노동대가를 받지 못하는 착취의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다음달 24일 공식 출범하는 대학원생 노조는 앞으로 대학원생들의 연구·노동환경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한편,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각 대학 대학원총학생회와 공동대응에 나설 방침이라고 한다.

용기있게 첫발을 뗀 이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길 바라고, 이들의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다행히 노조 설립 소식이 알려진 뒤 이메일, 페이스북 등에서 가입 문의가 잇따르고, 졸업생·교수의 응원 메시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구슬아 대학원생 노조위원장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문제는 “‘대학원생 대 교수’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대학원생 노조 출범이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교 당국이 평등한 주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대학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이 됐으면 한다.

<정유진 사회부 차장>